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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빛바랜 '전문가 정부'

이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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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엔 진보는 ‘깨끗하지만 무능하고’, 보수는 ‘부패하지만 유능하다’는 이미지가 고정관념처럼 남아 있다. 지난 문재인 정부는 고질적인 진보=무능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끗하고 유능한 정부’를 내세웠다. 그러나 조국 사태를 통해 도덕적 위선이 드러나고, 부동산 사태를 겪으며 무능의 덫은 오히려 강화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유능한 정부’를 슬로건으로 걸고 당선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대선 때부터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들을 모시겠다”고 강조한 것은 그런 연유다. 윤 대통령이 ‘서오남’이라는 비판을 무릅쓰면서도 검찰과 관료 출신들로 대통령실과 내각을 꾸린 것은 이들이 유능하고 능력 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한데 취임 후 반년간의 국정은 윤 대통령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이태원 참사’에서 드러난 정부의 능력은 유능함과는 거리가 멀다. 전문가들로 꾸려진 내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마추어 수준임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이 유능한 전문가였다면 사전 위기 징후를 무시하지도, 병력지원 요청을 묵살하지도, 참사 후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관료들은 정해진 법규와 원리에 충실한 집단이다. 주어진 업무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는 데는 뛰어나지만 경직성과 폐쇄성으로 유연하고 창의적 사고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한계다. 정부가 참사 첫날부터 “주최자가 없어 대비 못 했다”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이 이를 웅변한다.

대통령 주변의 검사들과 특권층 엘리트들은 권력지향적으로 비친다. 국민과 눈을 맞추기보다는 최고권력의 의중을 살피는 게 그들의 생존방식이다. 대통령실부터 총리, 행안부 장관, 경찰청장, 용산구청장 등 책임자들이 하나같이 현실과 동떨어진 언사로 시민의 염장을 지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희생자를 사고자로, 참사를 사고로 굳이 고집하는 것도 자신의 안위를 쥔 권력자만 쳐다보기 때문이다. 국민의 아픈 마음에 조응하려는 최소한의 공감 능력도 상실한 것이다.

대통령실과 내각에 기라성 같은 경제관료 출신들이 즐비한데도 민생이 별반 나아지지 않는 것도 서민의 삶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탓이다. 전례 없는 TV생중계로 눈길을 끈 비상경제민생회의에 비상도 경제도 민생도 없었다는 건 그만큼 정책집행자들이 국민과 유리돼 있다는 얘기다. 레고랜드 채무 불이행으로 기업들이 자금난으로 아우성인데 한 달 동안 뒷짐 지고 있던 것도 맥락은 같다. ‘민생과 경제를 챙기지 않는다’는 답변이 대통령 부정평가 이유로 빠지지 않는 게 왜겠나.

우리나라 헌법 제7조에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돼 있다. 하지만 국민 생명과 안전의 최일선에 선 경찰 지휘부는 봉사는커녕 무능하고 나태했다. 어떻게 위험이 도사린 현장을 놔둔 채 잠을 자고, 근무지를 이탈하고, 늑장을 부릴 수 있는가. 학벌 좋고, 스펙이 뛰어나다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공복의식에 투철한 것은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철저한 게 보수의 가치라는 점에서 ‘어설픈 보수’라고밖에 볼 수 없다.

오는 10일로 취임 6개월을 맞는 윤 대통령은 최대 위기에 놓였다. 이태원 참사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남은 임기를 좌우할 분수령이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이 뒤늦게라도 사과한 것은 다행이지만 시작일 뿐이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강조한 ‘조직화된 무책임’이야말로 국민적 분노의 비등점이 될 수 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국정 운영 기조의 전면적 쇄신이 필요하다. 그 첫걸음이 대통령실 참모들과 내각의 개편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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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

한국일보 전 주필. 1987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사회부장, 편집국장, 수석논설위원, 주필을 역임했습니다. 만 35년 간의 기자 생활을 마치고 2022년 12월 퇴사했습니다. 오랜 기자 경험을 토대로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우리 사회 현안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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