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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치밀한 계략에 '위안부 ∙ 독도' 허 찔렸다

이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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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분 걸림 -

한일 정상회담이 사실상 한국의 '완패'로 끝난 가운데 일본의 치밀한 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일본이 사전에 주요 의제와 발언, 의전 등을 면밀하게 준비한 반면 윤석열 정부는 일본의 '선처'만 기대한 채 회담에 임했다는 겁니다. 정부는 부인했지만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 등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게 사전 준비 부족을 보여준 단적인 예입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기시다 총리의 위안부 합의 이행 요구와 독도에 대한 입장 전달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통령실이 17일 "한일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든, 독도 문제든 논의된 바 없다"고 밝힌 데 이어 박진 외교부 장관은 18일 KBS 9시 뉴스에 출연해 "독도라든지 위안부 문제는 의제로서 논의된 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박 장관은 진행자의 추가 질문에 "정상회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을 아꼈습니다.

이런 답변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논점을 회피하는 전형적인 대응 방식입니다. '정상회담에서 논의하지 않았고 의제로서 논의된 바 없다'는 말은 정상회담이 아닌 자리에서 대화를 통해 나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실은 당초 위안부 발언은 사실상 인정하고 독도는 부인했다가 다음날 모두 부인으로 입장을 바꿨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측이 일본 측에 강하게 항의해 한일 정부가 조율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 언론도 그 후에는 추가 보도를 자제하는 모양새입니다.  

일본의 행태는 사전에 치밀하게 짠 각본으로 분석됩니다. 한국의 강제동원 문제 후퇴 방침이 확고해졌으니 한발 나아가 이번 기회에 다른 현안도 제기하는 게 낫겠다는 전략을 세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안을 언급할 장소로는 정상회담이 아닌 만찬 자리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틈타 기시다 총리가 말을 꺼내는 게 자연스럽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이 두 차례나 만찬을 주선한 것을 이런 측면에서 분석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배우자들과 함께 하는 공식 만찬에서는 민감한 문제를 거론하기가 적절하지 않아 별도 자리를 마련했다는 분석입니다. 더구나 윤 대통령이 과거 일본에서 먹었던 오므라이스의 추억을 얘기한 터라 극진히 대접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일본 사정에 정통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도 "두 번째 만찬에서 배우자가 빠진 채 두 정상만 자리한 이유가 뭐겠느냐"고 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계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다면 일본 고위관계자가 기시다 총리의 위안부와 독도 언급 사실을 공개했을 때 대통령실에서 곧바로 우리 언론에 윤 대통령의 대응 발언을 밝혔을 겁니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일본 언론의 보도가 나온 뒤에야 우리 언론에 그런 사실이 없다며 늑장 대응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의 발언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허를 찔린 상황에서 상당히 당황했을 걸로 보입니다.

한일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10일 정진석 국민의힘 전 비대위원장은 비밀리에 일본을 방문해 자민당 유력자들과 만났다고 합니다. 정 전 위원장은 "기시다 총리의 입에서 직접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라는 과거 담화 문구를 언급해 달라"고 했다고 하지만 결국 무위에 그쳤습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을 강행했고, 그 것이 약점이 돼 되레 청구서를 잔뜩 떠안았습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18일 YTN에 출연해 "사실 일본이 깜짝 놀랐다. '이렇게 하면 한국 국내 정치에서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우리(일본)로서는 이것이 학수고대하던 해법이었다는 반응이었다"고 뒷얘기를 소개했습니다. 한국이 양보한 만큼 일본도 성의를 보이지 않겠느냐는 취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국민 의사에 역행하는 외교정책을 편 것을 자화자찬하는 듯한 태도가 놀랍습니다. 일본이 조만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와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등을 강행하면 정부가 어떻게 반응할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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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전 주필. 1987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사회부장, 편집국장, 수석논설위원, 주필을 역임했습니다. 만 35년 간의 기자 생활을 마치고 2022년 12월 퇴사했습니다. 오랜 기자 경험을 토대로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우리 사회 현안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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