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윤석열∙ 김건희가 졌다
한동훈 대표 등 국민의힘 새 지도부 초청 만찬에서 가장 눈길을 잡아맨 건 윤석열 대통령이 말미에 했다는 발언이다. "한 대표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혼자 해결하도록 놔두지 말고 주위에서 잘 도와줘라"고 했는데,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다. '윤석열 번역기'를 돌려보면, '한동훈이 설치지 않게 당에서 잘 견제하라'는 뜻일 게다. 새 지도부 축하자리에 원희룡, 나경원을 부른 것만 봐도 윤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가 느껴진다.
"화기애애했다"는 만찬장에는 김건희 여사가 등장하지 않았다.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만찬 자리에 빼놓지 않고 얼굴을 내밀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예전과 같이 한 대표와 격의없이 지내던 사이는 끝났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김 여사의 속내도 윤 대통령 못지 않게 복잡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윤 대통령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여당 전당대회 결과는 한동훈의 승리가 아니라 윤석열의 패배다. 대통령실의 '전당대회 불개입' 공언과는 달리 아무 생각이 없던 원희룡의 등을 떠민 건 윤 대통령이다. 이 분명한 신호에도 당원들의 선택은 요지부동이었다. 지난 전당대회에서 꼴찌 후보를 대표로 만들었던 용산의 위세는 졸지에 사라졌다. 총선에선 민심에 심판받고 이번엔 보수진영, 보수당원들로부터도 외면당한 꼴이다.
예상치 못한 김 여사의 참전은 타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윤 대통령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정무감각 뛰어난 김 여사가 은연 중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필살기로 던진 명품백 사과 문자는 '김건희 리스크'만 키운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전당대회 막판에 검찰 조사에 응한 것도 나름의 승부수였을지 모르나 검찰총장까지 실토한 특혜 논란으로 물거품이 됐다. 지난 대선 때 '개 사과'로 국민의 속을 뒤집어놨던 그대로다.
권력의 무게 추 급격히 이동할 것
화난 민심 가라앉히는 게 급선무
'패자 윤석열'을 기다리는 건 엄혹한 현실이다. 한동훈은 더 이상 윤 대통령의 손아귀에 있지 않다. 검찰에서 선후배로 지내던 사이는 끝난 지 오래고, 장관과 비대위원장을 시켰을 때의 한동훈은 어디에도 없다. 오랜 기간 '윗사람'이었던 윤 대통령의 우세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권력의 무게추는 현재권력에서 미래권력으로 신속히 움직이고 있다. 그 사실을 윤석열도 알고, 한동훈도 안다. 다만 모르는척 하고 있을 뿐.
윤 대통령과 한동훈 간의 시각 차를 단적으로 드러낸 게 국민의힘 전당대회 연설이다. 윤 대통령이 목놓아 외친 구호는 '한 팀' '운명공동체'였지만 한동훈은 대표 수락연설에서 '민심'에 방점을 찍었다. 윤석열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했지만 한동훈은 성큼 다가온 대권에 꽂혀 있었다. 당분간 두 사람은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겠지만 파국은 예정된 경로다. 하늘아래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다는 건 변하지 않는 이치다.
윤 대통령이 손에 쥔 카드는 거의 없다. 항간에 떠도는 '김옥균 프로젝트'는 소설감도 못 된다. 지라시에서 말하는 '3일 천하'에 그친 김옥균이 한동훈이 아니라 윤석열이란 우스개도 나도는 형편이다. 한동훈 당선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막지 못하는 마당에 무슨 힘으로 압도적인 표차로 선출된 당 대표를 끌어내리겠는가. '한동훈 캐비닛'과 '윤석열∙김건희 캐비닛' 가운데 누구 것이 더 큰 지는 대보나마나다.
윤 대통령이 그나마 남은 임기를 무사히 보내려면 모든 걸 내려놓는 방법밖에는 없다. 한동훈을 상대하며 애면글면할 게 아니라 국민을 마주보는 게 현명하다. 자신과 배우자의 의혹 규명에 협조해 화난 민심을 가라앉히는 게 시작이다. 허물은 가리려한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다. 윤 대통령 부부에게 허여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