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 대통령의 '과하지욕'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행한 예우는 일찍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극진했다. 1박2일의 짧은 일정에도 '국빈' 대접을 하며 미국 대통령에겐 처음으로 무궁화대훈장을 안겨줬다. 황금을 좋아하는 트럼프 취향에 맞춰 복제품이지만 천마총 금관을 선물로 줬다. 오찬 때는 금으로 장식한 디저트를 올렸고, 만찬에는 트럼프 이름이 들어간 와인을 준비했다.
이 대통령이 트럼프에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융숭한 대접을 한 건 조금이라도 관세협상에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에서였을 것이다. 수시로 결정을 바꾸고 조변석개하는 트럼프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심정이 생생히 보였다. 이 대통령은 일본 다카이치 총리처럼 노벨평화상 추천 얘기만 안 했지, 트럼프를 향해 "세계사적으로 큰 일을 이룬 위대한 역량"의 소유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웬만한 환대에는 익숙한 트럼프도 최고 수준의 예우에 연신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고맙다"는 말을 여섯 차례 반복하며 손님 대접에 감탄했다. 심지어 이 대통령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아무 때나 연락하라"고도 했다.
이번 회담에선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던 한미 관세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협상 타결 소식은 트럼프가 만찬장에 가는 도중 불쑥 꺼내면서 알려졌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전격적이었다. 정상회담이 끝난 후 만찬까지 사이에 한국이 제시한 안을 수용하기로 결단한 것으로 보인다. 해외순방 기간 중 성과가 필요하다는 인식도 있었겠지만 자신을 '왕'처럼 대접한 한국에 대한 고마운 생각도 담겼을 것이다.
한미 관세협상은 시작부터가 일방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미국으로부터 얻어내기보다는 얼마나 덜 빼앗기느냐가 관건이었다.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와 제조업 쇠락의 책임을 전 세계에 떠넘기려는 의도였고, 그중 만만하다고 여긴 한국에는 더 가혹했다. 가장 강력한 동맹국을 휘청거리게 할 수준의 현찰을 요구하고, 그게 아니면 턱없이 높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한 게 트럼프다. 그럼에도 트럼프를 환대하고 '약탈적' 협상을 받아들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현주소라는 사실을 이 대통령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미국과 관세 협상 고비마다 "국력" 언급
주변 강대국 사이 고민 깊은 한국 대통령
그간의 협상 과정은 한국이 처한 상황의 절박함을 보여주고도 남는다. 외신에서 "일본보다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낸 주요 외교 성과"라고 평가하듯이 우리 정부는 수십 차례의 회담을 거치며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텼다. 트럼프가 '만만치 않은 협상가'라고 치켜세운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협상 상대 장관의 집을 찾아가고, 그 장관이 트럼프 수행 차 영국을 가자 그곳까지 따라갔다.
이 대통령은 미국과 협상의 주요 고비마다 "국력을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취임 직후 트럼프와 첫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향하면서, 그리고 회담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같은 말을 했다. 이 대통령은 29일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이 끝난 뒤에도 참모들에게 "국력"을 얘기했다고 한다. 최대 강대국인 미국의 막무가내식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자조가 짙게 묻어난다. 이 대통령이 국군의날 행사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얼마든지 지킬 수 있고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한 것과, 전시작전권을 미군으로부터 돌려받는 것을 '환수'가 아닌 '회복'이라고 직접 고친 것도 그런 답답함의 발현이다.
이 대통령은 1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회담에서 또하나의 산을 넘어야 한다. 사드 사태 이후 한국을 옥죄는 '한한령'과 한중FTA 문제를 풀어야 하고, 핵추진잠수함 도입에 따른 중국의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 11년 만에 방한한 시진핑을 환대해 미국보다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실리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주변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 대통령의 숙명이다.
'반미주의자'로 알려졌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첫 미국 방문에서 "53년 전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 모른다"고 말해 '친미' 논란을 불렀다. 그러자 노무현은 '한신도 무뢰한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는 과하지욕(袴下之辱)을 언급했다.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지금의 수모는 견딜 수 있다는 고사를 인용해 자신의 심경을 나타냈다. 이 대통령이 트럼프와 시진핑을 국빈으로 대접하는 것도 그런 뜻이 담겨 있다. 국력과 국익, 자주를 추구하는 국가지도자였던 노무현의 그림자가 이 대통령에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