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 대통령, '진짜 정치'의 시작
한미관세 협상 타결로 이재명 대통령은 31일 페이스북에 올린대로 외교적 중대 고비를 넘어섰다. 세부적 손익계산은 따져봐야겠지만 협상에 뒤늦게 뛰어든 것치고는 비교적 선방한 것으로 보인다. 한미FTA 체제에서 관세 '0%'를 적용받다 '15%'로 수직상승한 것은 아쉽지만 애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우격다짐으로 시작된 협상 틀에선 불가피한 측면이 컸다. 무엇보다 쌀과 소고기 시장에 대한 추가 개방을 막아낸 것은 다행이다.
미국과 관세협상에서 이 대통령은 시종일관 '전략적 침묵'을 택했다. 미국에 급파된 협상단으로부터 수시로 보고받고, 협의하면서도 공개적 발언은 극도로 자제했다. 반대 진영에선 협상 실패시 책임 지지 않으려는 계산이라고 폄훼했지만, 트럼프와 맞상대하는 모습을 피하려는 궁여지책이었을 공산이 크다. 이 대통령이 '장차관 워크숍'에서 "협상에 악영향을 줄까봐 말을 안 했다"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만약 이 대통령이 관세협상 방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했더라면 판도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앞으로 펼쳐질 상황은 그런 의도된 침묵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관세협상 타결이 1단계였다면, 이로 인해 야기될 후폭풍은 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다. 당장 3500억 달러의 대미투자가 뇌관이다. 미국 제조업 부흥을 위한 재원 마련에 한국의 작년 GDP의 20% 규모를 제공해야 하는데, 뒷감당이 걱정이다. 바이든 정부 때 우리 대기업의 대규모 대미투자로 국내 일자리와 투자가 위축된 것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 닥칠 수 있다.
2주 내로 예정된 한미정상 회담은 더 험난하다. 트럼프가 이재명 정부 출범 두 달이 돼서야 "선거 승리를 축하한다"고 하고, 두 번이나 미룬 정상회담을 수용한 이유가 뭐겠는가. 관세협상 타결을 빌미로 한국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속셈이라는 건 능히 예상할 수 있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는 주한미군 수를 대폭 줄이거나 역할을 '대중 견제'로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방위비분담금 대폭 증액과 무기구입 확대 요구도 청구서에 포함돼있다고 봐야 한다.
한미정상 회담 등 후속 과제 더 험난
이 대통령, 전면 나서 능력 보여줄 때
이런 위기 상황을 국민에게 알리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주체는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관세와 안보협상이 한반도와 우리 경제에 가져올 변화를 가감없이 전달해 국가적 역량을 한 데 모으는 건 대통령만이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이 대통령 특유의 투명성과 진정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대통령은 역대 정부 처음으로 국무회의 생중계 등 파격적 소통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주요 회의에서 토론을 활성화하는 등 실질적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이다.
아쉬운 건 이 대통령이 불리한 사안에선 소통 의지가 선택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고위공직자 인사 문제에서 그런 경향이 엿보였다. 강선우∙이진숙 전 장관 후보자 낙마와 강준욱 전 국민통합비서관 사퇴 등 인사검증 논란이 들끓는데도 이 대통령은 가타부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최동석 인사혁신처장 막말 논란에도 말이 없었다. 국정 동력을 갉아먹고 국민적 비판이 제기되는 사안이라는 점에 비춰 소극적이란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한편에선 참모들이 이 대통령에게 누가 돌아가지 않도록 알아서 방어막을 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관세협상과 안보 문제는 전 국민의 삶과 안전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이다. 국가지도자가 자신이 잘 아는 분야는 전면에 나서고, 피하고 싶은 사안에는 뒷짐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대통령의 지난 두 달은 윤석열이 망가뜨린 나라를 정상화하는 기간이었다. 이제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과제를 오로지 이재명 정부의 능력으로 평가받을 때가 됐다. 여야 정치권, 보수와 진보진영을 가리지 않고 국론을 결집하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 대통령의 '진짜 정치'가 이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