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 대통령의 '후계자' 키우기
여권에서 때 아닌 후계자 논쟁이 벌어졌다. 유튜버 김어준씨가 김민석 국무총리의 미국 방문을 두고 “차기 지도자 육성 프로그램의 일환"이라고 말한 게 발단이다. 이에 김 총리가 "어처구니없는 공상"이라고 반박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이번 사안은 김씨와 김 총리 간에 그간 불거진 긴장 관계가 없었더라면 크게 논란 삼을 건 아니다. 김 총리는 김씨가 또 도발을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박지원 의원 말대로 '모른 척하고 즐기면' 될 일이다.
김 총리는 지난 1월에 이어 두 달만에 미국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도 만났다. 당초 국회 대미투자특별법 통과 설명을 위한 출장이었지만, 1차 방미 때 만나지 못했던 트럼프와의 회동은 예기치 않은 성과였다. 덕분에 그는 운동권 시절 미 문화원 점거 농성으로 생긴 '반미주의자' 딱지를 말끔히 털어냈다. 차기 미국 대선에서 유력한 공화당 후보로 거론되는 밴스 부통령과 두 번째 만남으로 개인적 신뢰 관계를 쌓은 것도 김 총리의 정치적 입지를 높였다. 이 대통령이 김 총리에게 외교 경험을 쌓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이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는 또다른 인사는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중동전쟁 발발 후 UAE를 방문한 강 실장은 19일 귀국해 1800만 배럴의 원유 확보 소식을 전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강 실장을 '전략경제협력 대통령 특사'로 임명했다. 그 후로 강 실장은 각국을 다니며 방산 수출과 경제 협력 분야의 업무를 측면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는 이례적으로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 비서실장과 핫라인을 구축하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 비서실장들이 보이지 않게 뒤에서 지휘를 주로 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이 대통령의 용인술에는 특징이 있다. 특정인에게 힘을 몰아주기보다는 경쟁 구도를 만들어 성과를 도출하게 하는 방식이다. 정치 지도자는 권력자가 억지로 키워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능력을 입증해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괜찮겠다 싶은 사람을 발탁해 기회를 주고 국민으로부터 평가를 받도록 하는 게 대통령의 역할이라는 소신이 확고해 보인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몇몇 논란이 됐던 정치적 상황도 수긍이 간다.
여러 인물 경쟁구도 만드는 '이재명 용인술'
잠재적 후보 다수 만들어 검증하는 게 바람직
지난해 이 대통령이 여권 내 반대를 무릅쓰고 조국 혁신당 대표 사면을 결정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당시 사면 배경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왔지만 범여권 내 경쟁 구도 형성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과 혁신당 합당에 대한 이 대통령의 긍정적 입장도 그 연장선으로 보인다. 합당이 되면 민주당이라는 하나의 정당에서 경쟁자끼리 서로 능력을 견주는 게 당의 활력과 긴장을 높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으리라 본다.
이 대통령의 시선은 지방선거, 나아가 총선·대선을 향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최대 과제는 정권 재창출이다. 보수진영에선 퇴임 후 재개될 재판에 대비한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부의 아무리 좋은 정책도 부정되는 상황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는 생각이 클 것이다. 일부에선 정권 출범 1년도 안 된 시점에 '후계자' 얘기가 나오는 상황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지만 단견이다. 일찌감치 잠재적 대선 주자군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 능력과 경험을 쌓도록 하는 게 국가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앞을 내다보는 이 대통령의 용인술로 범여권의 차기 지도자군은 이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여권 일각에선 벌써 '8인 체제'라는 얘기가 나온다. 김민석, 조국, 강훈식뿐 아니라 정청래 민주당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 정원오 서울시장 후보, 박찬대 인천시장 후보 등이 거론된다. 이 대통령 특유의 인물 키우는 방식을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대상은 더 늘어날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역량을 발휘해 여권 지지층뿐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인정을 받느냐 여부는 전적으로 그들 몫이다.
민주주의 전문 연구기관인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 순위는 2024년 41위에서 2025년 22위로 급반등했다. 문재인 대통령 재임 시절 10위권을 유지하다가 윤석열 취임 후 곤두박질 치던 것이 이재명 정부 출범으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허물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국민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정치 지도자는 국가를 위험에 빠트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윤석열 같은 인물을 막기 위해선 미리미리 잠재적 후보군을 설정해 철저하고 투명한 평가를 받도록 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차기 지도자 키우기는 우리 사회의 당면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