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대법원 판결 무력화해도 괜찮나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 해법안으로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자 대법원 판결을 정면으로 위배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2018년 대법원이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전범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무력화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당시 대법원이 신일본체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등 피고 기업들에 배상 책임을 물었는데 우리 정부가 이를 무시하면서 피해자들과 법적 다툼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과 11월 일제 불법행위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피고 기업들은 대법원의 손해배상 명령을 거부했고, 피해자 쪽은 피고 기업의 국내 특허권과 상표권을 압류하고 특별현금화하는 절차를 밟고 있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은 미쓰비시 등의 "국제법 위반과 불법 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당시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 법원의 국제 재판 관할권"을 전제로 한 최고 헌법 해석기관의 판단입니다. 이번 해법은 "불법적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구제"를 시도한 대법원 판결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위헌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각에선 행정부가 사법부 권한을 침해해 '3권분립'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윤석열 정부의 해법이 헌법 해석과도 맞지 않는다는 견해도 나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전문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제하에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 헌법 규정에 비추어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적인 강점"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부의 해법은 식민지배가 합법이었다는 일본의 주장에 정당성을 실어줄 우려가 큽니다.
더 큰 논란은 피해자 쪽이 배상금을 수령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할 경우입니다. 정부는 이 경우 피고 기업과 채무인수 계약을 체결해 '채권자 동의 없는 채권소멸'을 추진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 정부와 피고 기업들의 합의로 피해자들의 채권을 일방적으로 소멸시킨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 쪽에선 피고 기업이 스스로 채무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채무를 인수한 것을 문제삼아 무효 소송에 나서는 등 법적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민법 제 107조 (진의 아닌 의사표시)에는 상대방이 표의자(말하는 자)의 진의가 아님을 알았거나 또는 알 수 있었을 경우에는 무효로 한다고 돼있습니다.
지원재단이 청구권 협정 수혜 기업 쪽에 기금을 요구하는 것이 권한 밖의 불법행위란 지적도 있습니다. 재단 설립 근거가 되는 특별법에는 지원재단이 피해자 보상·배상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지원재단이 지난 1월 정관에 '일제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피해보상 및 변제'를 신설했지만 모법을 뛰어넘는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지원재단 측은 6일 "기부금 출연은 기업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으로 우리가 요청하지는 않는다"고 밝혔으나 법적 다툼의 소지가 있습니다. 일부 민간 기업은 정부 요청이 없는 상황에서 기부금을 출연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배임 등의 문제가 있다며 난색을 표명했습니다.
법원에 강제징용 소송이 많이 계류돼 있는 것도 이번 해법이 미봉책에 그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대법원 판결로 인정된 피해자는 4건 15명에 불과합니다.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인 소송만 66건에 1,124명에 이르는데, 대법원이 2018년 판결을 번복하지 않는 한 대부분 승소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 정부가 공식 인정한 강제동원 피해자가 21만 8,639명에 달한다는 점에서 일부 기업의 출연금으로 피해 배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단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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